백유경

옛날 어떤 도적이 있었다.
그는 나라의 창고에서 물건을 훔쳐 멀리 도망갔다.
그러자 왕은 사방으로 병사를 파견하여 그를 잡아왔다.
왕은 그가 입은 옷의 출처를 물었다.
그가 말하였다. “이 옷은 우리 조부 때의 물건입니다.”
왕은 그 옷을 다시 입어 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옷은 본래부터 그가 입던 옷이 아니었기 때문에 입을 줄을 몰랐다.
손에 있을 것을 다리에 끼고 허리에 있을 것을 머리에 썼다.
왕은 그것을 보고 대신들을 모아 그 일을 밝히기 위해 그에게 말하였다.
“만일 그것이 너의 조부 때부터 내려온 옷이라면 마땅히 입을 줄 알아야 할 것인데 왜 위아래를 뒤바꾸는가. 입을 줄 모르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 옷은 도둑질한 물건이 틀림없다.”

***
이것을 비유한다면 이렇다.
왕은 부처님과 같고 보배창고는 법과 같다.
또한 어리석은 도적은 저 외도들처럼 부처님 법을 훔쳐 들고 그것이 자기들의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을 펼 때에 위아래를 모르는 것처럼 법의 모양을 모른다.
그것은 마치 저 도적이 왕의 옷을 얻고도 그 입는 방법을 알지 못해 뒤바꾸어 입는 것과 같다.

세종대왕 / 世宗

백성이 나를 비판한 내용이 옳다면, 그것은 나의 잘못이니 처벌해서는 안되는 것이오.
설령 오해와 그릇된 마음으로 나를 비판했다고 해도, 그런 마음을 아예 품지 않도록 만들지 못한 내 책임이 있는 것이다.
어찌 백성을 탓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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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ng Sejong the G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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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朝鮮 世宗, 1397년 5월 7일[1] (음력 4월 10일) ~ 1450년 3월 30일 (음력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성(姓)은 이(李), 휘(諱)는 도(祹), 본관(本貫)은 전주(全州), 자(字)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이다. 세종은 묘호(廟號)이며, 시호(諡號)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고, 명에서 받은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존시를 합치면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이 된다.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다.[2][3]

한성 준수방(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고을에서 아버지 정안군 이방원(靖安君 李芳遠)과 어머니 민씨(閔氏)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종 8년(140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태종 12년(1412년), 둘째 형 효령군 이보(孝寧君 李 補)와 함께 대군으로 진봉된다. 1418년 첫째 형 이제(李 褆)가 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얼마 후 부왕의 선위(禪位)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태종이 대리청정을 하며 국정과 정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沈溫)과 그의 측근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김종서,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체제는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세종은 재위 기간 동안 과학, 경제, 국방, 예술,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다. 이것은 20세기 주시경(周時經)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반도에서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10월 9일은 한글날로 기념한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징옥, 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平安道)와 함길도(咸吉道)에 출몰하는 여진족(女眞族)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倭寇)를 토벌하고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다. 이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418년부터 1422년까지 부왕인 태종이 태상왕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부왕 태종이 훙서한 후 1422년부터 1442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442년부터 1450년 승하할 때까지 첫째아들 문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